욕망은 설명할 길이 따로 없다. 내 두 눈을 통해 펼쳐지는 영상이 왜 그렇게도 매혹적인지, 왜 ‘나도 모르게’ 그 영상에 몰입하게 되는 것인지? 왜 나는 욕망이 사로잡히는 것인지? 결핍되었기 때문에, 혹은 억압된 무언가가 나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혹은 금기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어떤 담론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글쎄, 욕망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하는 갖가지 시도는 돌아서면 그 효력을 잃게 될 때가 많은 것 같다. 욕망의 생성 원인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라는 의혹과 함께, 욕망은 스스로가 자신의 근원지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위에 언급한 것들을 통해 나의 욕망의 생성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은 이제까지 내가 읽어왔던 소설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문학 비평가들은 그것을 작가의 죽음, 혹은 신 없는 글쓰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글쓰기가 독자인 나로 하여금 주는 느낌은 벌거벗음, 얄팍함, 중심 없음 같은 것이었다. 그 느낌을 영화 <사이에서>에 대해 토론할 때 언급되었던 ‘실존’이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존. 나의 의지에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나. 필연, 존재 근거, 진리, 삶의 목적, 의미는 결국 허무로 돌아가고 남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잉여적 존재로서의 존재. 내 존재를 설명할 수 없듯이, 내 욕망도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험버트 험버트의 님펫을 향한 욕망은 그의 삶을 압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는 험버트 험버트가 그의 삶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남기는 것(욕망의 이정표)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내가 더 놀랐던 것은 ‘그러한 험버트 험버트의 삶을 낯설고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었다. 험버트 험버트를 통해 ‘욕망이 삶을 압도 한다’라는 말을 떠올린 것은 이제껏 내가 삶이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해왔음을 뜻했다. 내 존재자체는 잉여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 삶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항상 나의 강박관념으로 자리잡아왔던 것이다. 때문에 나의 욕망-내 존재처럼 설명할 길 없고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욕망-이 삶을 압도해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를 의미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욕망의 대상에는 내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욕망의 대상은 항상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왜 항상 욕망이라고 하면 붉고, 퇴폐적이고, 파괴적이고,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욕망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관계가 클 것이다. 과학기술, 기계의 발달, 전쟁, 핵무기 등등등 인간성을 소외시킨다고 하는 수많은 것들, 신은 죽었다고 하는 선언, 그리고 개인의 아이덴티티가 말살되는 ‘구조’ 속에서, 욕망은 어쩌면 인간성의 절규와 같은 것으로 제시된 카드인지도 모른다. 욕망의 대상에 내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 것 같은 이유는, 욕망이 ‘자아개발’과 ‘자아실현’과는 이미 다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욕망의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욕망’으로 취급될 수 없고, ‘목적이 있는 수양’ 소크라테스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욕망은 이중적이다. 내 실존을 살며시 전해주는 움직임이면서도 동시에 ‘삶’(일상)을 파괴하는 힘을 가졌다. 나의 의지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면서도 또 내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고,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끈이다. 즉, 욕망은 ‘삶’이기도 하고 ‘파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욕망은 욕망 자신을 ‘이중적’이라고 만드는 구분자체를 무력하게 만든다. 욕망은 ‘이중적’인 면을 가진다고 이야기함으로서 ‘이중성’을 없애버린다. 험버트 험버트가 끌고 가는 이야기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욕망을 미궁으로 몰고 가고 모든 것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게 만들면서 결국 존재만 남게 만들게 했다. 거기에 더 덧붙일 말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신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개념자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은 신을 통해 나의 원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신이 이끄는 목적으로 향해가며 그에 따라 나의 삶의 의미를 채워야 한다. 그런데 험버트 험버트에게는 목적이 없다는 게 그의 목적인 것 같다. 님펫을 향한 욕망에 충실 하는 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중요하고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삶의 목적, 삶의 가치를 찾고자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구원받는 것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즉, 그는 그의 욕망에 회의를 품거나 거부하거나 극복하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의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의 전반에 나타나는 그의 죄의식과 함께 흐르고 있다.
그의 죄의식은 1)어린 소녀에 대해 성적 욕망을 품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어 있음(롤리타의 경우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금기까지 적용됨)에 의해, 2)자신의 욕망이 님펫의 삶을 버려놓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의 개인적인 번뇌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죄의식이라는 것이 다소 흥미로웠다. 그는 1)과 2)에 대한 변호를 책 중간 중간, 잊지 않고 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갖는 죄의식이 원죄와 같은 종류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배심원인 나에게 설득하는 것 같다. 어린 소녀와의 성행위와 근친상간은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적용되는 규범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공간과 시간에 있었다면 그것들은 금기가 아닐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험버트 험버트는 자신은 그저 자연에 따를 뿐이다, 자신은 자연의 충실한 사냥개라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갖는 죄의식과 공포를 배심원에게 되묻는다. 왜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규범에 의해서 가두어져야 하는가를 되묻는다. 2)번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가장 끔찍스러운 점’은 ‘아무리 비참한 가정의 삶도, 근친상간의 패러디이며 자신이 롤리타에게 줄 수 있었던 최선의 삶보다는 더 나았으리라는 것’이 ‘보수적’인 롤리타에게 점차 인식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험버트 험버트의 죄의식은 그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욕망을 죄로 만드는 사회제도, 규범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그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과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죄로 만드는 것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 욕망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험버트 험버트에게 있어서 ‘죄’라는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이름을 씌움으로부터 ‘죄’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성/감정, 노동/유희, 규칙/우연성이라는 이분된 차원을 넘나들며 그 경계를 통해서 에로티즘을 느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그는 자신이 어린 소녀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사실’과 근친상간을 ‘범한다’는 것을 통해 에로티즘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그렇게 이분된 차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상황을 전개시킨다. 폭력은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의 욕망도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의 욕망은, ‘금기를 깨뜨리고 위반을 충동하는 것’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달 필요가 없다. 그의 죄의식을 ‘금기의 위반’이라는 것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없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번에 해당하는 그의 죄의식에 대한 적절한 변호가 되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2)번에도 그만큼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답답함을 준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험버트 험버트의 세계일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각은 험버트 험버트의 내부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적절했고 충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인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바로 이 롤리타. 욕망의 대상인 바로 이 롤리타.
롤리타가 험버트 험버트의 욕망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은, 과연 문제가 되는 것일까? 욕망의 대상은 나의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그 욕망의 대상을 ‘파악’할 수 없다. 뭐,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은 있을 수 있겠지만, 100%의 파악과 이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있음을 느끼고, 어쩌면 그 거리로부터 욕망이라는 것은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험버트 험버트도 이렇게 말한다. “반투명의 신비 속에는 늘 기쁨이 있기 때문일까?”
사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롤리타가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서술되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존재인 것은 확실하지만, 나는 계속 롤리타가 험버트 험버트의 외부에 - 그것도 매우 철저히 외부에 존재하고 있음이 뭔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롤리타는 그녀의 외양과 외양과 외양과 특정 성격으로만 그녀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은 내 외부에 존재한다’라는 사실은,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롤리타로부터 ‘롤리타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부분’이 무엇인지 밝혀낼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 『롤리타』라는 소설을 롤리타가 다시 직접 써내려가지 않는 한.
그런데 험버트 험버트가 욕망을 내재하고 있듯이, 롤리타도 자신 안에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 사실로부터, 나는 이리가레이를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 당연한 전제인, ‘험버트 험버트는 남성/ 롤리타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소설 속에서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나의 못마땅함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전에 할 말이 있다. 언어화에는 이미 선택이라는 행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내가 이 당연한 사실(험버트 험버트는 남성/롤리타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굳이 다시 확인하려고 하는 의도는 나보코프에게도 해당되어야 할 것이다. 즉, 왜 굳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이 소설에 적용하려 하느냐라고 내게 질문하고자 한다면, 똑같이 나보코프에게도 왜 화자가 남성이고 화자의 욕망의 대상이 여성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문학 작품을 페미니즘 혹은 막시즘의 시각을 통해 비평하려할 때, 이를 마치 문학적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방식인 것처럼 취급할 때가 있는데, 작가는 신이 아니다.
왜 나보코프는 험버트 험버트의 독백 형식으로 소설을 썼을까? 모든 인물은 험버트 험버트의 생각으로 정리된다. 나보코프는 험버트 험버트가 욕망을 내재하고 있듯이 롤리타도 자신 안에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것을 일부러 잘라낸 것일까. 그런데 이 책1)의 작품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문이 있다.
“만일 그가 구제하지 못할 괴물이라면 롤리타는 어떤가? 그녀가 여아로 변장한 악마라고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험버트가 지켜주려 한 순결을 롤리타는 캠프 큐에서 우습게 버린다. 험버트가 심각하게 자제한 정욕을 롤리타는 가볍게 허물어뜨린다. 험버트에게 숙명적인 사랑이 롤리타에게는 그저 게임에 불과했다. 속이고 이용하고 그리고 끝내는 도망간다.”


물론 역자는 도덕적 토론이 이 소설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위와 같은 구문을 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롤리타가 철저하게 험버트 험버트에게로 수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효과를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는 ‘동일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의 배재’라고 하는 이리가레이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못마땅함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롤리타의 욕망이 무엇일까, 롤리타 자신이 드러내고 싶어한 모습은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 유발되었다.
또 하나 내가 롤리타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를 궁금해 하는 것은, 소설 전반에서 내가 느꼈던 얄팍함, 중심 없음, 벌거벗음이라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주는 실존적 허무, 험버트 험버트의 욕망에 대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음, 을 사실 나는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이야 어쨌든 자신의 욕망을 일단 채워야만 하는 절박함과 롤리타에 대한 욕망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통렬한 지옥’을 험버트 험버트는 은근히 내비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롤리타를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내뱉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욕망과 사랑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욕망의 대상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고자 하는 노력-그 노력이 완성되는 순간이 없을지라도 그 노력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험버트 험버트의 사랑은 매우 미성숙하지만.)

“…그러자 롤리타는 말했다.「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충격으로 저절로 무릎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게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비열하고, 야비했고, 거칠고, 그 이상 모두였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눈치 챌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지옥이었다. … ”

“나는 (롤리타에게) 언제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신 건강법을 더 따랐다. 이제, 기억으로 몸부림치고 애원하면서 나는 이것과, 또 비슷한 경우들에서 항상 편하려고 롤리타의 마음 상태를 무시하는 게 내 방법이고 습관이었음을 깨닫는다.”

험버트 험버트의 독백을 따라가다가, 아주 가끔 등장하는 이러한 그의 성찰은, 시각을 롤리타에게로 전환시켜주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험버트 험버트의 욕망이 가진 매마름과 롤리타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사랑이라는 곳으로 도착했다. 험버트 험버트의 욕망을 읽어가면서, 나는 욕망이 가진 삶에 대한 파괴적 힘과 실존으로서의 생명력을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롤리타의 욕망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험버트 험버트의 욕망은 결국 매우 미성숙하고 자기보호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죄의식에 대한 변호는,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너무 자신에게 가두어져 있다. 사회가 자신의 욕망을 ‘죄’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은 롤리타를 ‘박제된 시각영상’쯤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눈치 챌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지옥이었다.”라는 그의 말이 주는 충격, 그의 욕망의 ‘매마름’을 어떻게 소화시켜야 할 지 난감하다. ‘험버트 험버트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조차도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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